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영화 "빌리 엘리어트" 비평

2016년 가을학기에 쓴 글

희극이자 동시에 비극이기 위하여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 대하여

 

Ⅰ. 들어가며- 영화 <빌리 엘리어트>와 그 해석에 대하여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1980년대 영국의 한 탄광촌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이다. 당시 총리이던 마거릿 대처가 석탄 산업 합리화 정책을 펼치자 그에 따라 많은 수의 탄광이 폐쇄될 위기에 처하는데, 광부들은 이에 노조를 조직해 집단 파업을 함으로써 맞선다. 주인공인 빌리의 아버지와 형도 마찬가지로, 특히 형은 노조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구치소에 잡혀 들어가는 등 고초를 겪기도 한다. 광산 산업을 기반으로 유지되고 있던 마을 더럼은 집단 파업으로 인해 점차 궁핍해지고, 구성원들을 둘러싼 갈등도 날로 첨예해져 간다.

이런 와중에, 소년 빌리는 우연히 자신이 다니던 복싱 클럽에서 발레 수업을 구경할 기회가 생긴다. 자신도 모르게 맘을 빼앗긴 빌리는 발레 선생인 윌킨슨 부인의 눈에 들어 발레를 배우기 시작하는데, 후에 그녀는 빌리에게 재능이 있다며 영국 로열발레스쿨에 도전해볼 것을 권한다. 그러나 그 때 발레를 배운다는 사실을 빌리의 아버지 재키에게 들키게 되고, 빌리는 아버지에게 발레를 금지당하지만 몰래 연습을 계속해 나간다. 이후 형인 토니의 구속 사건으로 빌리는 오디션 날짜를 놓치게 되지만, 마침내 재키에게 춤을 보여줌으로써 발레를 계속해도 좋단 허락을 받는다. 이후 로열발레스쿨에 오디션을 치러 가서 자신의 거칠고 에너지 넘치는 춤을 선보이고, 마침내 학교에 입학해 촉망받는 발레리노로 성장하게 된다.

이런 서사 구조를 갖고 있는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얼핏 보면 남성판 신데렐라 스토리와도 비슷하다. 가난한 왕자님을 구제해 줄 공주님이 없고, 어디까지나 빌리 자신의 힘으로 성공한다는 점이 다르지만, 노력을 통해 태생적, 경제적인 어려움을 뚫고 원하는 모습으로 성장한다는 점에서 현대인이 꿈꾸는 ‘자기개발’의 서사와도 닮아 있다. 하지만 이를 단순히 자기개발의 서사로 보기에는 아쉬운 지점이 너무도 많은데, 어떤 관점에서 보는가에 따라 이 영화에 부여할 수 있는 의미 또한 매우 다양해지기 때문이다. 빌리는 단순히 가난하고 착한 ‘신데렐라’가 아니고, 그가 추는 발레 또한 ‘유리 구두’가 아니다. 또한 그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 역시 동화 속처럼 선과 악이 명확히 구분되는, 균질하고 아름다운 동화의 세계가 아니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또 복잡다단한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물로서, 또한 다양한 경계 위에서 춤추듯 뛰놀고 때로는 분노하고 싸우는 개인으로서 빌리를 조명한다면, 이 영화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Ⅱ. <빌리 엘리어트>를 해석하는 다양한 관점

1. 더럼의 성격- 젠더와 계급의 관점으로

전술하였듯, 빌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는 매우 복합적이다. 작품의 공간적 배경은 ‘더럼’이라는 광부 마을에 한정되어 있지만, 사실 더럼과 같은 공간은 영국 어디에나, 아니 이 시대 지구 어디에나 존재했다. 가난하고, 전통적 젠더 관념이 뿌리 깊게 박혀 있고, 남성성과 그로 인한 폭력성이 강조되고, 남자애들은 복싱을 배우고 여자애들은 발레를 배우는 마을. 더럼이 지닌 폐쇄성, 경직성, 남성성 등을 몇 가지 구분기준에 따라 설명하는 것은 무리이겠지만, 그래도 굳이 기준을 꼽자면 두 가지, 바로 ‘계급’과 ‘젠더’가 아닐까 한다. 우선 첫째로 경제적 계급의 관점에서 더럼을 살펴보자. 앞서 설명했듯 더럼은 광부 마을로, 탄광의 경영 사정에 모든 것을 기반하고 있다. 탄광 운영이 원활한 때에도 광부 마을은 경제적으로 그다지 풍요롭지 못한데, 이것은 ‘광부’라는 직업 자체가 자본주의 경제 하에서 하층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근대 사회를 거치며 육체를 통한 노동과 지적 노동이 구분되면서, 후자는 전자에 비해 우위에 서서 더 높은 연봉과 복지, 사회적 대우를 받게 되었다. 전근대 사회에서 극소수의 ‘젠틀맨’ 계층, 즉 축적된 자본이 있어 노동하지 않고도 연명할 수 있는 이들을 제외한 모두가 이러한 육체노동에 노출되어 있었기에 대부분의 노동자가 평등했다고 한다면, 현대로 올수록 전술하였던 육체노동과 지적 노동의 분화가 일어나면서 그 위상 또한 변화하였다. 육체노동의 경우 사회적 인식과 위상이 과거에 비해 낮아진 듯 보이는데, 이는 1980년대라는 시대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더럼은 경제적 하층 계급에 속한 광부들이 모인 마을이기에 마을 자체로도 하층 계급에 속하게 된다. 더군다나 파업 상태가 지속되면서 마을의 경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이는 빌리를 둘러싼 마을의 상황이 더욱 궁핍해져 가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빌리라는 존재, 빌리라는 ‘이질적 요소’의 출현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작품 속에서 더럼이 경제적 하층 계급을 대표하는 공간이라면, 상층 계급을 대표하는 공간은 바로 로열발레스쿨이다. 영화는 외관 상에서부터 이 두 공간의 차이를 극명히 보여주는데, 이는 ‘발레’라는 요소가 더럼과 얼마나 이질적인지, 따라서 더럼 안에서 발레를 하는 빌리 역시 얼마나 이질적으로 비춰졌을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빌리의 아버지인 재키는 맨 처음 아들이 발레를 배운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우선 ‘젠더적인’ 관점에서 보고 분노한다. “남자애들은 레슬링이나, 복싱을 하는 거야”라고 윽박지르는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빌리의 형인 토니는 젠더적인 관점은 물론 다른 관점에서도 분노를 보이는데, 바로 “지금 내가 구치소에 잡혀가고 파업을 하는 와중에 넌 발레나 배우겠다고?”와 같은 말에서 볼 수 있다. 그는 빌리가 계급에 맞지 않는 행위를 하기 때문에, 마을은 물론 가정의 경제적 상황과 동떨어진 행위를 하고 있기 때문에 화를 낸 것이다. 사실 윌킨슨 부인의 도움이 없었다면 빌리는 발레를 배울 수도, 오디션을 볼 수도 없었으리라는 점에서 토니의 분노, 황당함은 일리가 있다. 거꾸로 말하면 윌킨슨 부인과 같은 변칙적인 도움 없이는 빌리 또한 자신의 계급 정체성을 극복하고 나아가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할 수 있다. 그만큼 빌리의 존재는 더럼에 있어서 이질적이었고, 도전적으로 비춰졌을 것이다.

둘째로 젠더의 관점에서 더럼을 살펴보자. 사실 이는 계급의 관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 앞서 육체노동을 중시하는 더럼은 경제적 하층 계급에 속하는 마을이라고 언급했는데, 육체노동이라는 것 자체가 더 많은 체력, 근력을 요구로 하는 것이기에 남성성을 보다 중시하는 분위기로 이어지기가 쉽기 때문이다. 탄광촌인 더럼이야말로 ‘남성성’, ‘강인한 육체’를 긍정하는 가장 전형적인 집단이다. 이 마을에서 정식으로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는 존재는 남자들 뿐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들 중 그 누구도 이러한 ‘사회적으로 공인받는 노동’에 종사하고 있지 않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윌킨슨 부인의 경우 발레 교실을 통해 돈을 벌긴 하나, 빌리가 그녀를 “어차피 촌구석에서 발레나 가르치는 실패자”라고 비하하는 데에서 알 수 있듯 사회적으로 공인받는 형태의 노동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각설하고, 이처럼 남성성이 중시되는 더럼이 젠더에 대해 보이는 태도는 매우 폐쇄적이고 부정적인 의미로 전통적이다. 고정적인 젠더 관념 자체가 기존의 남성 위주 가부장제 사회에서 나온 것이기에, 가부장제의 특징이 강하게 남아 있는 더럼에서 젠더 고정관념이 강한 것 역시 당연한 현상이라 하겠다. 자신의 호불호와는 관계없이 ‘남자 아이이기 때문에’ 당연히 복싱을 배워야 하는 상황, 발레에 관심을 보이자 여자아이들이 그것을 놀리는 상황, 발레 관련 서적을 빌리기 위해 도둑질을 하듯 몰래 도서관에 가야만 하는 상황, 발레 교습 장면을 아버지에게 들켰을 때 아무 말 없이 끌려가 취조당하는 상황 등은 모두 더럼이 얼마나 폐쇄적인 젠더 관념을 갖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특히 재키와 빌리의 갈등 장면이 결정적이다. “왜 내가 발레를 하면 안되는가”라는 빌리의 질문에 재키는 제대로 된 답변을 내놓지 못하는데, 이는 젠더 고정관념 자체가 뚜렷한 진실이나 어떤 근거에 기반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러하다. 젠더 고정관념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이유에 따라 명확한 절차를 거쳐 형성되는 게 아니라 ‘그냥’, ‘원래부터 그런 거니까’ 만들어지고 또 유지된다. 이런 당연한 생각에 의문을 제기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문제가 된다. 빌리의 “왜?”라는 질문에 재키가 분노하는 게 바로 이런 이유이다.

그렇다면 이렇듯 폐쇄적인 젠더 관념을 가진 더럼에 빌리는 어떤 존재였을까? 빌리는 그 자체의 젠더 정체성을 변화시키기보다는, 사람들이 갖고 있던 막연한 ‘젠더’라는 것의 형태를 변화시켰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돌멩이 삼아 젠더 고정관념 자체를 깨부수기보다는 사람들이 갖고 있던 고정관념을 좀 더 완화된 형태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는 빌리가 자신의 소년으로서의 정체성을 거부하고 완벽히 반대편의 젠더, 즉 사회가 규정하는 ‘여성’ 젠더에 소속되고자 했다면 이룰 수 없는 성과였다. 빌리는 소년임과 동시에 발레를 함으로써, 사람들이 명확히 두 통에 나뉘어 있다고 믿어 왔던 것들이 실은 한 통에 뒤섞일 수도 있는 것들이었음을 몸소 보여주었다. 사실 젠더 고정관념 자체를 완전히 거부한 인물은 따로 있었는데, 바로 빌리의 친구인 마이클이었다. 마이클은 집에 아무도 없을 때 누이의 옷을 몰래 입어보고 화장을 하는 등 ‘남성’으로서의 젠더 고정관념에 전면으로 위배되는 행위를 한다. 중요한 점은 그가 ‘죄책감’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마이클은 이처럼 전통적인 젠더 관념을 가진 마을에서 자랐음에도 자신의 젠더 정체성을 혼란스러워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자연스레 받아들였는데, 이는 그의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빌리는 비록 자신의 성 정체성에 변화를 겪지는 않지만, 그의 곁에 이런 친구를 둠으로써 발레를 염원하는 자기 자신을 좀 더 수월하게 받아들이고 긍정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점에서 마이클은 더럼이라는 폐쇄적 사회에 존재하는 긍정적인 ‘틈새’이며, 비록 젠더 고정관념이 퍼져 있는 사회라도 그것이 아예 변화 가능성조차 없지는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빌리가 아버지의 지지를 얻어 발레 오디션을 보기로 했을 때 마을 사람들이 그를 응원해주는 것 역시 같은 맥락에 있다. ‘전통적인 젠더 관념을 가진 마을’이라는 것은 사실 매우 추상적이고 애매한 정의이다. 실제로 마을 구성원 개개인을 들여다봤을 때 마이클처럼 틈새로서의 면모를 갖춘 이들이 분명 존재하고, 이들은 조용히 마을의 질서와 분위기 전체를 변화시켜 나가기도 하는 것이다.

 

2. 미학적 언어로서의 ‘춤’, 그 효과와 한계

또 하나 주목해서 봐야 할 점은, 작품이 사용하는 ‘춤’이라는 언어의 성격이다. 작품 속에서 ‘춤’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 빌리가 언어, 즉 말을 사용해서 아버지와 대화했을 때와, 춤을 사용해서 대화했을 때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존재했다. 맨 처음 발레 교습 장면을 들켰을 때 빌리가 “발레를 하고싶다. 왜 하면 안되나”하고 말했을 때, 재키는 그의 말을 이해하거나 경청하기보다는 윽박지르는 반응을 보였다. 이는 맨 처음 아들의 예상치 못한 모습을 발견했을 때의 놀라움, 분노, 배신감이 큰 탓도 있었겠지만, 그가 이성적인 ‘말’을 통해서는 설득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디션을 놓친 직후 윌킨슨 부인이 찾아와 설득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재키는 빌리가 발레를 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고, 오디션을 놓친 것을 안타까워 한다거나 미안해하는 등의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맨 마지막, 크리스마스 때에 우연히 불 켜진 체육관에서 빌리를 마주쳤을 때의 자세는 사뭇 달랐다. 영화는 재키가 빌리의 춤추는 모습을 단순히 ‘목격하도록’ 이야기를 짜지 않고, 부자가 눈을 마주치고, 서로가 서로를 의식하게끔, 즉 그들이 ‘춤’을 매개로 하여 소통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짰다. 이 장면을 통해 영화의 수용자 역시도 그들이 언어로는 할 수 없었던 소통을 춤을 통해서 비로소 이루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는 ‘말’을 통하는 언어로서는 이룰 수 없던 성과이며, 춤이라는 미학적 퍼포먼스가 가진 힘이라고 할 수 있다. 빌리가 갖고 있던 요소들, 진정성, 춤에 대한 갈망, 발레에 대한 열정 등이 춤을 통해 분출되었고, 춤의 형식에 문외한인 재키 역시 이를 이해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형식과 장르를 넘은 ‘춤’이라는 언어의 힘이고, 미학적 퍼포먼스가 일상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이다.

 

3. 떠난 자와 남겨진 자들

하지만 안타깝게도, 미학적 퍼포먼스는 그것을 겪은 이들에게 일시적인 변화 혹은 일부 정체성의 변화를 가져올 수는 있지만 그들을 둘러싼 모든 상황의 해결책이 되어주지는 못한다. 이는 사실 당연한 이야기이다. 퍼포먼스는 현실을 기반으로 만들어지고 또 현실에 영향을 미치되, 애초 현실을 개혁하거나 혁신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만들어지는 ‘도구’는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빌리의 춤 역시 그가 처한 젠더, 계급의 정체성에 기반해 있고 빌리를 둘러싼 조건, 가족과 마을 등의 성격에 영향을 끼치긴 했지만, 애초 그것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시작한 것이 아니므로 이를 빌리의 퍼포먼스의 ‘한계’라고 이름지을 수 있을지도 사실 의문이다. 하지만 영화는 분명히 빌리의 퍼포먼스가 이룬 성취와 그것에서 제외된 사람들의 모습을 동시에 비추고 있다. 빌리는 발레를 함으로써 그 자신의 정체성을 변화시키고 가족과 마을 사람들의 젠더 고정관념을 변화시켰으며, 나아가 로열발레스쿨이라는 상류 계급의 정체성에 파장을 일으켰고 발레라는 고급 예술이 가진 성격에도 돌을 던질 수 있었다. 영화의 맨 마지막에서 성인이 된 빌리가 <백조의 호수>의 백조가 되어 날아오르는 장면이 이를 집약적으로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영화는 다양한 ‘남겨진 자들’의 모습을 비추기도 한다. 첫째로 빌리가 오디션에 합격한 이후 노조 파업이 중지되고, 어쩔 수 없이 다시 광산으로 내려가는 광부들의 모습이다. 광산 엘리베이터에 탄 채 어두운 지하로 돌아가는 이들의 모습은 실로 절망적이다. 빌리의 퍼포먼스는 분명 마을 전체에 유의미한 변화를 가져왔지만, 그들이 처한 경제적 상황까지 총체적으로 변화시켜 주지는 못했다. 빌리의 가장 가까이에서 변화를 경험한 가족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둘째로는 토니가 빌리의 버스를 배웅하며 뒤에 홀로 남겨지는 장면을 들 수 있겠다. 토니가 뒤에 남겨지는 모습을 그토록 쓸쓸하게 그린 것은 그가 동생에게 갖고 있던 애정을 보여주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빌리가 떠난 이후 지속될 그의 일상이 얼마나 지난할지를 예고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셋째로 홀로 체육관에 남겨진 윌킨슨 부인의 모습이다. 윌킨슨 부인은 빌리에게 최초로 발레라는 가능성을 제공하고, 그가 오디션을 치르고 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 준 인물이다. 따라서 빌리의 기쁨을 공유하고 그의 성공을 축하해야 마땅하지만, 실제로 빌리가 로열발레스쿨에 입학하게 됐을 때 그녀는 기쁨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빌리가 떠난 이후 음악도 없이 썰렁한 체육관에 혼자 남은 모습은 매우 쓸쓸하고 또 정적이다. 이는 빌리라는 희망, 가능성이 떠나고 다시 시작될 더럼에서의 일상, 계급적 정체성에 얽혀 지속해야만 할 일상의 이미지이다.

이렇듯 모두가 빌리를 이해하고 성공하도록 도왔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빌리는 떠나고 다른 이들은 남겨지리라는 것을 한 마디로 표현한 장면이 있었는데, 바로 로열발레스쿨 오디션 시 심사위원이 재키에게 “파업이 잘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었다. 빌리의 춤이 가진 역동성, 에너지에서 가능성을 발견한 심사위원들은 빌리를 자신들의 질서 내로 받아들이되, 그의 아버지이자 이전의 질서를 대표하는 인물인 재키에게는 그의 현실, 파업이라는 현실을 되새겨주는 말을 남긴다. 빌리가 로열발레스쿨에 들어갔다고 해서 그를 둘러싼 기존의 세계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퍼포먼스가 결국은 마을을 둘러싼 현실적 문제들까지 해결하지는 못했다는 점에서 이는 분명 현실이 미학적 퍼포먼스에 대해 갖는 힘이자 동시에 퍼포먼스의 본질적 한계점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Ⅲ. 빌리에게 발레란? 정지인가 해방인가?

이렇듯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참으로 다양한 관점과 주제를 통해서 해석할 수 있는 작품이다. 빌리 개인에 집중해서 보면 여러 반대와 어려움을 뚫고 자신의 추구하던 바를 손에 넣은 성공 스토리이고, 아버지 재키에 집중해서 보면 왜곡된 남성성을 바로잡고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희생하는 감동 스토리이며, 위기에 처한 더럼을 중심으로 본다면 여러 가지 변화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기존에 있던 자리로 되돌아갈 수 밖에 없는 상당히 절망적인 스토리가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영화가 이 모든 해석을 염두하고 있으며, 뮤지컬 등의 연출과 연장선상에서 봤을 때 단면적인 희극, 비극 둘 중 어느 것으로도 해석되기를 거부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빌리의 성공인가, 실패인가, 혹은 더럼의 발전인가, 아닌가로 따지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다. 어떤 서사에 무게를 싣는가에 따라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우선순위 역시 달라지고, 이는 관객이 해석하기에 달려 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빌리에게 발레는 분명 어떠한 ‘변화’의 시작점이었다는 것. 그로 인하여 빌리와 빌리를 둘러싼 세계의 일부가 분명 변화하였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아주 일시적인 변화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Song!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

댓글을 사용하지 않는 블로그입니다.

#15
무라타 사야카 "소멸세계" 중간 끄적끄적
#17
연극 "햇빛샤워" 비평